◆ 시(詩), 노래를 찾다
시와 노래는 밤하늘에 무수히 빛나는 별과 같다. 홀로 빛나기도 하지만 함께 빛나는 은하수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연인과도 같다. 아낌없이 주면서 서로를 아낀다. 아직은 대중음악에 대한 시인들의 낯설음이 있고, 시가 노래 가사로 거듭나기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시의 가치와 정체성을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게 시 노래에 대한 사견(私見)을 옮긴다.
◆ 시와 노래의 역사
인류 문명과 언어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어떤 형태로든 시와 노래는 서로 보완하고 소통하며 발전해 왔다. 예악(禮樂)의 전통을 정리하고 계승한 공자(孔子)의 기본 교육은 원래 노래(詩)였다. 시(詩)라 하여 그냥 낭독만 할 것 같지만, 실제로 리듬을 타면서 노래까지 불렀다. 다만 당시 시경(詩經)은 매체 부재로 멜로디가 전래 되지 않았을 뿐이다. 춘추시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선구자인 공자는 이미 2500년 전부터 실용음악으로서의 시 노래의 중요성을 설파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고대국가의 틀을 갖춘 삼국시대부터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가요 <정읍사(井邑詞)>나 신라의 <향가(鄕歌)> 등에서 시 노래의 기록이 보인다. 우리나라의 현대 시문학 초창기인 20세기 초는 한국 대중음악 태동기와 비슷한 시기에 맞물려 있다. 1919년 최초의 자유시 주요한의 <불놀이>가 발표될 즈음, 작사가 미상의 노래 <희망가>가 유행하기 시작하며 1926년 최초의 대중가요 윤심덕의 <사의찬미>로 흐름을 같이한다. 일제 강점기에도 시 노래가 많이 발표되기도 했으나 다수 대중에게 알려지기에는 시대적인 상황으로 결과물이 미흡하고 부족한 면이 있었다.
◆ 우리나라 시 노래 선구자 시인 김소월
1922년 김소월(본명 김정식, 1902~1934)이 ‘개벽’에 시 <진달래꽃>을 발표하고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출판하면서 서정성과 대중성을 바탕으로 정한(情恨)의 정서를 보편적 운율에 담아냈다. 전 국민이 좋아하는 시인 김소월은 10곡 이상의 대중가요 히트곡을 보유한 ‘인기 작사가’ 이기도 하다. <진달래꽃>(마야 노래), <개여울>(정미조 노래), <못잊어>(장은숙 노래), <실버들>(희자매 노래),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활주로 노래), <예전에 미쳐 몰랐어요>(라스트찬스 노래), <초혼>(민지 노래), <부모>(유주용 노래) 등 대중들에게 애창되는 노래들이다. 대중음악뿐만 아니라 가곡 <산유화>와 동요 <엄마야 누나야>도 많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렇듯 소월은 약 204편의 시(詩) 중에서 대략 80편 이상의 작품이 대중가요로 발표된, 가장 많은 시가 노래로 불려 진 시인이다. 동요와 가곡까지 가창(歌唱) 장르를 확장하면 소월의 시 노래는 더욱 풍성해진다. 대중음악 군(群)에서도 팝, 발라드, 록, 포크, 트로트, 댄스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多種多樣)하다.
몇 가지 통계를 조금 더 들여다보자. 1950년대부터 소월의 시는 대중가요로 4백 명이 넘는 가수들이 노래로 불렀다. 가수들이 제일 많이 부른 노래는 가수 유주용 외 70여 명이 부른 <부모>이다. 1968년 세상에 선보인 이래 어버이날이 있는 5월이 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명곡이 되었다. 그 뒤를 <못잊어>, <개여울>, <진달래꽃> 등이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소월의 시로 가장 많은 노래를 작곡한 사람은 1세대 코미디언 서영춘의 친형 작곡가 서영은(1927~1989)이다. 유주용이 부른 <부모> 등 무려 39편에 곡을 붙였다. 특히 <못잊어>는 1983년 ‘KBS-TV 전국노래자랑’에서 123명의 아마추어 가수들이 불러 그해 가장 많이 부른 노래 1위로 기록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소월의 서정시 <진달래꽃>과 <초혼>이 록(Rock)버전의 아주 빠른 리듬으로 파워풀 하게 불렸다. 시대의 변화로 이해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현대로 올수록 음악 패턴이 빨라지고 있다. 과연 소월이 살아서 이 노래를 들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소월이 나이 20세부터 쓴 이 시(詩)들이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노래로도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는 우리 국민 고유의 정서인 정(情)과 한(恨)을 미학적으로 가장 잘 표현하였고, 둘째는 음악을 좋아하고 흥(興)이 많은 우리 민족이 노래할 수 있는 운율(현대시에서는 7.5조가 주를 이룬다)과 리듬을 갖췄고, 마지막으로 지금 시대에 들어도 촌스럽지 않은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과 순수하고 정제된 단어들을 시어로 사용했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도 소월 시는 많은 작곡가와 가수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며, 노래 이외에도 미술과 뮤지컬 등 여타 예술 장르와 크로스오버(crossover)하면서 현실 속에 살아 숨 쉰다. 2023년 5월에는 소월의 시와 화가 천경자의 그림이 시화(詩畵)로 만났고, 올해 1월에도 소월의 시를 주제로 한 최초의 뮤지컬 <어제의 시는 내일의 노래가 될 수 있을까?>가 실험적인 포-뮤지컬(Po-musical) 형태로 무대에 올랐다.
◆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대중가요
필자가 확인한 최초의 대중음악 히트곡은 1965년에 발표한 시인 김동환의 <산넘어 남촌에는>(박재란 노래)이다. 그 뒤를 1969년에 발표한 김소월의 <부모>(유주용 노래)가 잇고 있다. 김소월 외에도 고은의 <세노야>(양희은 노래), <가을편지>(최양숙 노래), 박화목의 <보리밭>(문정선 노래),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박인희 노래), 김남조의 <그대 있음에>(송창식 노래), 장만영의 <사랑(순아)>(최헌 노래), 김광섭의 <저녁에(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유심초 노래), 서정주의 <푸르른 날>(송창식 노래), 정호승의 <이별노래>(이동원 노래), 박해수의 <바다에 누워>(높은음자리 노래), 정지용의 <향수>(이동원·박인수 노래)가 1970~80년대를 대표한다. 1990년대 들어 정호승 시인의 <부치지 않은 편지>(김광석 노래) 이후 맥이 끊겼다가, 2,000년대 들어 2003년 김소월의 <진달래꽃>(마야 노래)과 2004년 <초혼>(민지 노래)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록 디스코(Rock disco) 버전으로 크게 유행했다. 그 후 20년째 대중적인 히트곡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소위 유명시인과 유명가수의 조합이 사라진 것이다. 유명시인들의 시 노래 창작 붐은 1970~80년대를 전성기를 거쳐 2000년대 중후반 반짝 회생의 기미를 보이다가 이내 침체기에 들어갔다.
◆ 시인 윤동주와 가수 윤형주, 그리고 시와시학
다소 지엽적일 수도 있겠지만, 지면의 성격상, [시와시학]과 시 노래에 대한 인연을 추억해 보자.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필자는 학창시절부터 오랜 친구, 현재 [시와시학] 발행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송영호로부터 그의 은사님이자 잡지 창간인 김재홍(1947~2023) 경희대 국문과 교수를 소개받았다. 김재홍 교수와 가수 윤형주는 대학동문이자 절친이다. 두 사람은 2005년 윤동주 시인 서거 60주기를 맞아 <윤형주가 들려주는 시인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라는 제목의 시 노래 헌정 공연을 함께 기획하며 의기투합했다. 당시 필자도 공연을 총괄하며 직접 참여했다. 지금도 [시와시학] 창간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재홍 교수가 무대에서 시 노래의 필요성을 열정적으로 강의하시던 모습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날 헌정 공연에는 시인 이가림, 문정희, 김종철과 성우 고은정, 소프라노 백남옥, 가수 윤형주, 한경애, 백영규 등이 출연하여 윤동주 애송시를 낭송했다. 가수 백영규는 ‘서시’에 직접 곡을 붙여 발표했고, 윤동주의 6촌 동생 윤형주는 시 낭송과 함께 헌정곡(獻呈曲) <윤동주님께 바치는 노래>를 불렀다. 출연자 대기실에서는 시인과 성우와 음악인들이 윤동주 시 노래에 대해 즉석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날 윤형주는 무대 위에서 흥미로운 일화를 소개했다. 윤형주의 부친 윤영춘은 1937년 ‘신동아’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5촌 조카 윤동주의 유골을 고국으로 안고 온 장본인이다. 아들 윤형주가 6촌 형(兄) 윤동주의 시에 노래를 만들겠다고 나섰을 때 ‘아서라. 시(詩) 다친다’라고 나무랐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윤형주가 누구인가. 1970년대 우리나라 포크 시대를 연 최고의 포크싱어 아닌가. <비의 나그네>, <라라라(조개껍질 묶어)>, <두개의 작은 별>, <우리들의 이야기>, <바보>, <사랑스런 그대>, <어제 내린 비>, <미운 사람> 등 수많은 히트곡을 가진 뛰어난 싱어송라이터이지만 아버지의 만류에 뜻을 꺾었다. 그래서일까. 당시 필자는 김소월과 함께 우리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는 ‘왜 대중가요로 알려진 작품이 없을까?’ 궁금해 했던 기억이 난다. 2025년 올해는 윤동주 시인 서거 70주년을 맞이한다. 올해 서거 70주년을 맞이하여 윤동주 시인의 헌정 공연이 다시 한번 이루어져서 고(故) 김재홍 교수와 가수 윤형주 두 분의 유지를 받들고 [시와시학]을 통해서 시 노래 창작 캠페인이 다시 대를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 미국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 노벨문학상 수상의 의미
외국의 경우도 살펴보자. 십 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노벨문학상의 예외적 사례로 회자되는 2016년 미국 출신 포크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Bob Dylan, 1941년생, 1962년 데뷔)의 노벨문학상 수상소식이다. 그의 이름이 수상자로 호명되었을 때 필자는 귀를 의심했다. 대중음악가가 수상하리라고는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밥 딜런이 누구인가? 전 세계 대중음악계 ‘노래하는 음유시인’의 조상이다. 밥 딜런의 노래 가사는 이미 미국의 고교와 대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당시는 시 창작 행위의 주체가 되는 사람의 ‘신분’이 문제였다. ‘노래 가사는 문학이 아니다’라는 일부 문학계의 저항으로 한때 수상 거부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과연 문학의 순수성이 훼손되었을까? 아니면 문학의 저변을 넓혔을까? 팔이 안으로 굽는 심정으로 필자는 후자에서 위무(慰撫)와 희망을 찾고 싶다. 당시 스웨덴의 한림원은 밥 딜런의 노래를 ‘귀를 위한 시’라고 비유하며 ‘노래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 냈다.’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2천5백 년 전에 써진 유럽의 고전(古典) 호메로스(Homeric. B.C.800년경 출생)와 사포(Sappho B.C.630년경 출생)의 시를 지금까지 읽고 우리가 그것을 즐긴다면 밥 딜런 또한 읽을 수 있고 읽지 않으면 안 된다.” 고 밝힌 수상 배경 설명이 아직도 신선하게 남아있다.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역사는 작사(詞)와 작시(詩)의 정서적인 간격을 한껏 좁혀 놓았다.
공연장 대기실에서 (윗줄 왼쪽부터 가수 백영규, 성우 고은정, 가수 윤형주, 시인 이가림, 시인 김종철, 시인 문정희, 필자)
◆ 저작권으로 본 시 노래
시는 노래와 마찬가지로 가사로서 지적재산권(저작권)으로 보호를 받는다. 저작권보호 기간이 (1차) 1957년 1월 28일 저작권법 제정 당시 저작자 사후(死後) 30년에서, (2차) 1987년 7월 1일 사후 50년으로, (3차) 2013년 7월 1일부터 사후 70년으로 연장되었다. 저작권법상 시나 노래를 사용하려면 창작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대표적으로 서두에서 밝힌 소월 시는 저작권 보호기간 만료로 권리 승계자의 별도 동의 없이 작품 사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가 외국의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음악을 사전 허락 없이 사용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 아직 저작권이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했던 시기에는 몇몇 해프닝 사례가 남아 있다.
박두진의 시 <해>를 모티브로 캠퍼스밴드 ‘마그마’는 <해야>라는 제목의 노래로 1980년 제4회 MBC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차지했으나 당시 박두진 시인의 사전 허락 없이 개사하여 잡음이 일기도 했다. 가수 조동진의 경우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고은 시인과의 인연으로 시 <작은배>를 차용하여 조동진이 곡을 쓰고 불렀다. 그럼에도 위 두 작품은 각각 조하문, 조동진 작사로 음악 신탁관리단체인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되어 있다. 가사의 일부라도 원작자인 시인의 사전 동의 없이 사용하면 표절에 해당된다.
시 쓰기와 가사 쓰기는 크게 다를 바 없다. 가사는 노래 부르기에 적합하게 쓰거나, 먼저 작곡이 된 오선지에 가사를 붙이는 경우가 다를 뿐이다. 작문기법으로 볼 때 노랫말의 운율이나 인체 구강 발성 구조에 맞춰 조사나 일부 단어가 수정된다. 시적 표현은 애초에 노래에 맞춰 쓰인 가사와는 달리 멜로디로 옮기려면 일정 부분 수정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저작권법에서는 작품의 ‘동일성 유지권’으로 보호하며 시를 그대로 인용하든, 일부를 수정하여 인용하든 반드시 원작자(여기서는 시인)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시가 노래에 사용되는 경우 단락을 들어내거나 아예 새로운 단락을 삽입하여 공동작사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시 원문에서 한 단락만 차용하는 경우도 있다. 1984년 가수 김수철이 작곡하여 발표한 <나도야 간다>가 그런 사례다. 1930년 발표한 박용철 시인의 시 <떠나가는 배>에서 후렴구 몇 줄만 가져왔다. 시 저작권 만료로 이 노래의 작사자는 김수철 본인으로 되어 있다. 짧은 글인 단시(短詩)의 경우 글을 반복하거나 새로 큰악절(大樂節)로 창작하기도 한다. 물론 시의 원문을 그대로 살린 훌륭한 작품도 있다. 단연 백미는 정지용시인의 시 <향수>이다. 자유시를 클래식과 대중가요로 결합시키고 순수문학을 대중음악과 결합시킨 대표적인 작품이다.
◆ 시인의 노래 일상에 옮기다
대중음악계에서는 작곡보다 작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왕년의 인기 작곡가들도 나이가 들수록 작곡보다 작사가 더 어렵다고 토로한다. 노랫말의 고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창작능력이 세월과 세파에 영향을 받는 정서와 감성의 빈약 등으로 멜로디 보다 가사가 먼저 고갈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요즘은 AI의 출현으로 작곡과 작사도 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AI를 통해서 작곡은 가능하겠지만 인간의 정서와 감성이 이입되고 배어있는 서정성 있는 노랫말이 가능할지는 의문이 간다. 과연 AI가 인간 고유의 시어 ‘나빌레라’나 ‘즈려밟고‘를 생성할 수 있을까?
현재 미국 빌보드(Billboard) 메인 싱글차트 ‘핫100‘에서 3위까지 랭크된 전(全) 세계적인 히트 곡, 우리나라 블랙핑크의 ‘로제’와 미국의 세계적인 팝스타 ‘브루노 마스’가 콜라보한 노래<아파트(APT)>만 하더라도 후크송(hook song)으로 같은 가사가 반복 될 뿐이다. 많은 대중가요가 그렇다. 노랫말의 주제나 소재, 메시지 등에서 예전에 비해 수준이 떨어졌다. 돌이켜보면 195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 대중가요 가사가 3절까지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노랫말의 표현이 풍부했다는 의미이다.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바로 시문학이다. 보통의 시 노래는 운율에 맞춘 정형시로 곡이 만들어 지고 주로 포크나 발라드 음악 장르에서 서정시 위주로 작곡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댄스, 힙합, 록, 트롯 등 장르를 불문한다. 그만큼 현대시에 적용하는 작곡 기법이 다양해졌음을 의미한다. 시인들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대중가요 노랫말을 보완하는 훌륭한 대안이 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시인들의 시가 대중음악 속에서도 동명이곡(同名異曲)으로 많이 만들어졌고 가곡이나 동요로 범위를 넓히면 무수히 많다. 예를 들면 김남조 시인의 시 <그대 있음에> 같은 경우는 대중가요(송창식 작곡)와 가곡(김순애 작곡)에서 전혀 다른 작곡으로 동시에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1955년)는 또 다른 노래 형태인 토킹 송(Talking song)으로 현대 시낭송을 대표하는 고전으로 남아 있다.
◆ 순수문학과 대중음악의 간극
시와 노래가 누구를 통해서 만나고 어떻게 작품으로 탄생하는지 살펴보자. 오래전에 가수 송창식이 <푸르른 날> 시가 좋아서 서정주 시인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당시 작품을 부탁하러 간 송창식의 심정은 어땠을까. ‘혹시나 거절하면 어떡하나?’ 문화예술 장르 간의 소통을 위해 간극을 메꿔야 하는 불안감이 있지 않았을까. 1920년대 대중가요 태동기부터 해방 전까지만 하더라도 시에 곡을 붙이기보다 시인들이 노래 가사를 쓰던 시기도 있었다. 1950년대 과도기를 거쳐 1960년대 들어서는 시인과 작곡가와 가수 간의 직접적인 삼자 인적교류가 시작되며 제법 소통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개인적인 교류는 시대의 흐름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인적교류가 없으니 작품교류는 더욱 어려워졌다. 이름이 알려져 있을수록 소통은 더욱 단절되었다. 문화예술 장르의 자존심이나 평판인지 아니면 사회적으로 이목을 받는 인기 있는 예술인들의 자만심이나 게으름은 아닌지 되돌아볼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다만 상징적인 사건 하나는 참고로 예를 들 수 있다. 1989년 시인 정지용의 시 <향수>가 대중가요로 작곡되고 소위 순수예술이라 지칭되던 클래식 성악가 박인수가 가수 이동원과 듀오(Duo)로 노래를 취입했다. 당시 클래식 음악계의 반발로 박인수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순수음악가가 어떻게 대중가수와 함께 노래할 수 있느냐’는 ‘웃픈’ 이유도 함축되어 있다. 당시만 해도 클래식을 전공한 음대 교수가 대중가수와 노래를 함께 부른 자체가 파격이자 이단이었다. 그만큼 문화예술 분야 간의 융합이나 교류가 단절되어 힘든 시절이기도 했다. 아직도 순수와 대중으로 나누어진 경계는 유효한 것 같다.
당시는 대중음악계를 소위 ‘딴따라’라 해서 천시하던 사회 풍조가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문화예술 장르 범위를 넓히면 시문학도 그런 영향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오직 ‘내 작품은 시로서만 문학계와 작품 수용자들의 평가를 받고 싶다.’는 생각은 시인의 정체성과 가치이고 당연히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은 문화예술 장르 간의 크로스오버가 유행이다. 심지어 연극, 뮤지컬, 미디어 등을 넘어 시문학뿐만 아니라 그림, 사진, 건축 등 다양한 장르와 대중음악이 교류 중이다. 노래에 관심을 갖고 있는 시인들에게 혹시나 있을 평판이나 이목 등 주위의 시선이 너그러워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 시를 사랑한 가수. 노래를 사랑한 시인
가수 이동원(1951~2021)은 시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가수다. 시인 정호승은 김소월 다음으로 시가 노래로 많이 불린 노래를 사랑하는 시인이다. 본인의 60편 이상의 시가 노래로 불린 현존 최고 낭만 가객이다. 이동원과 정호승의 인연도 각별하다. 이동원은 1984년 일면식도 없는 정호승에게 무작정 찾아가 시 <이별노래>를 받아와서 작곡가 최종혁에게 곡을 부탁했다. 최종혁은 <열애>(윤시내)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최백호) 등을 히트시킨 대중음악계 대표 작곡가였다. 이미 셀럽(Celebrity)인 시인과 음악가의 작품 중매를 자청한 것이다. 실제로 이동원은 <이별노래>(정호승 시), <향수>(정지용 시), <가을편지>(고은 시), <내 사람이여>(백창우 시) 외에도 세상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애인>(장석주 시), <귀천>(천상병 시), <명태>(양명문 시), <물나라 수국>(김성우 시), 그리고 현재 [시와시학] 대표인 김초혜 시인의 <사랑>도 노래로 불렀다.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시를 노래로 불러 대중에게 알렸던 진정한 시(詩) 매신저였다. 대중음악계에서 그를 ‘노래하는 음유시인’이라 부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2021년 지병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정호승이 빈소를 직접 찾아 조문을 하며 현세에서의 한 살 터울 두 사람의 인연은 멈췄다. 예전에 노래를 사랑하는 시인 정호승이 ‘시 속에 노래가 있고 노래 속에 시가 있다.’라고 한 말은 고인이 된 이동원에게 바치는 헌사(獻辭)가 되었다. 필자도 이동원 생전에 시 노래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을 귀 따갑도록 들었다. 시인이 되지 못해 가수가 되었다는 이동원. ‘시 자체가 노래’라는 시 예찬론자 이동원은 이제 곁을 떠나고 없다.
1970~80년대 선배가수 송창식과 이동원의 시노래 작업에 이어 2000년대 들어 후배가수 안치환이 대물림하며 계보를 이어왔다. 당시 안치환은 2004년 김남주시인의 헌정앨범 <나와 함께 이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에 이어 2008년 시 노래음반 <정호승을 노래하다> 등 아예 시로만 앨범을 발표하였다. 노랫말의 중요성을 처음부터 인식해온 선후배 뮤지션들과 노래를 사랑하는 시인들이 시 노래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원의 못다 핀 꿈을 대신 이루어주면 어떨까.
◆ 시어와 대중음악 가사
대중음악계에서는 정해진 용어는 아니지만, 통상적으로 시인들의 시 노랫말은 ‘작시(作詩)’로 그 외는 ‘작사(作詞)’라 구분한다. 물론 대중음악으로 만들어진 시는 유명시인의 유명작품뿐만 아니라 일반시인들의 작품까지 모두 아우른다. 현대 시인들의 시집을 읽다 보면 음악적으로도 정말 훌륭한 작품이 많다. 지금도 전국에서는 시를 성악이나 대중가요로 옳기는 모임이나 행사들이 많다. 그러나 대중적 측면으로 볼 때 시인이나 작곡가, 가수(성악가)가 대부분 덜 알려져 있다 보니 수준이나 파급력에서 대중적인 한계에 부딪힌다.
물론 필자는 문학 전문가는 아니다. 노래에 가사가 포함되어 있어 부득이 익힌 알량한 지식임을 밝혀 둔다. 근래까지는 시의 갈래로는 정형시, 서정시에 바탕을 둔 작품이 노래로 알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산문시까지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특히 문학 기법으로 수미상관(首尾相關)이나 반복이나 영탄법은 작시와 작사에 똑같은 경향으로 나타난다. 감정이입을 통해 화자의 심정을 강조하고 운율을 형성하며 효과적으로 전개한 시가 가사로서는 환영을 받는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민요 율격과 각 연의 끝마다 반복되는 후렴구는 미학(美學)이 되어 리듬감과 운율을 조성하기도 한다. 자연이나 사물을 의인화하거나 반어법, 역설적 표현 등 우수한 한글의 정제된 표현은 노랫말의 감정이입을 최대치로 끌어낸다.
다행히 표준어에 없는 시어들도 작곡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다만 대중 수용자들이 노랫말에서 이해할 수 없는 단어나 현대어 표기 규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바뀌는 부분과 지금은 쓰지 않는 단어들을 가려내고, 가창법에 영향을 미치는 조사 또는 시문(詩文)을 첨삭하여 사용하고 있다. 시를 가사로 옮기며 모티브만 차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현대인들의 언어 사용 행태나 습관으로 인해 노랫말도 대중 정서에 반응하는 것이다.
◆ 노랫말로 살펴 본 시의 효용가치
대중음악 노랫말을 살펴보면 퇴폐적, 말초적이고 통속적인 표현도 많다. 그래서 때로는 사회의 지탄을 받기도 한다. 대중들의 언어 정서에 해롭다는 이유다. 필자는 여성가족부에서 국내외에서 발표하는 모든 노래에 대한 ‘청소년 유해물 음반심의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특히 노랫말의 폐해를 심각히 들여다 본적이 있다. 물론 어른도 예외는 아니다. 시는 인간 감성의 원천이자 훌륭한 정화제이기 때문에 시 작품 주제와 소재들은 그대로 대중음악에 대입해도 훌륭하다. 섬세한 감정표현과 서정적인 묘사, 인간관계에서의 상처와 치유, 슬픔, 그리움, 회한, 희망, 용기, 기쁨 그리고 주제로는 사랑과 정, 이별, 자연, 고향, 부모, 인생 등과 토속적, 향토적 시어, 감각적 이미지 사용 등 시 창작으로 구현되는 모든 시 작법들이 대중음악계에는 훌륭한 자양분이 된다.
◆ 국민정서에 기여하는 선한 영향력의 시 노래
우리는 원래 감성이 풍부한 민족이다. 반세기 전만 해도 동방예의지국이고 효(孝)와 도(道) 사상에 바탕을 둔 백의민족이었다. 그러나 산업의 발달로 대가족제가 해체되고 자살률이 세계 1위를 기록하는 등 사회적 요인으로 정서 결핍 현상이 두드러졌다. 특히 4차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인성(人性)이 메말라가며 고유의 민족 정체성과 가치, 풍속 등을 잃어 국민정서 회복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다. 문화예술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시기이며 특히 시 노래는 국민 정서를 위무하고 활기를 주는 최적화된 문화상품이 될 것이다.
◆ 경제적 가치로 본 시 노래
예술적 측면뿐만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도 유용하다. 소위 수요와 공급의 경제 원칙이 문학계와 대중음악계에도 적용된다. 문학의 ‘시’라는 훌륭한 수요와 대중음악의 ‘노래’라는 양질의 공급시장이 존재한다. 쉽게 풀면 시인과 가수가 작곡이라는 매개로 상생하는 것이다. 시인과 가수와 작곡가 3자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문화예술시장의 또 다른 블루오션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서로를 어려워하거나 아직은 일부 배타적인 시선이 존재할 뿐이다. 요즘 전 세계에 위상을 드높이고 있는 케이 팝(K-POP)으로 시야를 넓히면 노랫말의 중요성은 더욱 절실해 진다. 경제적 가치 뿐 만 아니라 문화 선진국으로서 한국의 우수한 한글콘텐츠를 알리는데도 기여도가 클 것이다.
◆「시와시학」의 역할
시와 노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영원한 동반자적 운명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와 노래는 원초적으로 한 몸이었을 것이다. 노래도 시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위로와 안식을 준다. 우리 인생사 희로애락이 시(詩)인들 다르겠는가. 계간 시문학 전문지 [시와시학]은 1991년 1호(봄호)를 창간한 이래 2025년 35년에 접어들어 통권 137호(봄호)를 발간했다. 그사이 역사와 전통을 쌓으며 우리나라 대표 시문학지로 자리매김했다. 대중음악계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시와시학]에 거는 기대치가 여기에 있다. 작년 필자는 경남 사천에서 열린 ‘박재삼 시인 시 노래경연대회’에 심사위원장으로 참석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작년 연말 [시와시학] 신인상 행사에서 <공주 풀꽃문학제> ‘나태주 시인 시 노래경연대회’에서 우승한 가수를 초청해서 나태주 시인 시 ‘사는법’을 노래로 들은 바 있다. 올해도 전국의 각 문학관에서 주최하는 시 노래창작경연대회가 여러 곳에서 열릴 것이다. 필자 소견으로는 [시와시학] 주최로 시인과 음악인들이 본인의 작품도 좋고, 전국의 시 관련 조형물이나 시비(詩碑)를 찾아 시 낭송도 하고 노래를 작곡하고 부르는 행사를 개최하여 전국적인 붐업(boom up)을 일으켜 시 보급에 기여하면 좋을 것 같다. 관점만 달리하면 시가 노래고, 시비가 곧 노래비가 아니겠는가.
노래는 대중음악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동요도 있고, 가곡도 있고, 종교음악도 있다. ‘시 노래 창작’ 형식의 교류 공간을 만들어 희망하는 전국의 시인들과 음악인들을 연결하는 창구를 만들어 보자. 예를 들면 시인이나 가수, 평론가를 초청하여 시 노래 토크쇼나 심포지엄도 개최할 수도 있겠다. 시와 노래 사이를 매개할 매신저 역할을 [시와시학]이 대신하며 시문학의 대중화와 대중음악의 고급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했으면 한다. 처음 창작할 때부터 유명한 시와 유명한 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대중이 관심을 갖고 읽어주고 들어줄 때 비로소 시도 노래도 빛난다.
「계간 시와시학」 2025 봄호 수록
김원찬 (대중음악평론가 / 뮤직컨설턴트)